덕계할아버지자료 모음

덕계 오선생 제문 - 한강 정구 민족문화추진회 발행 본에서 옮겨옴

galgun 2021. 2. 13. 06:49

祭德溪吳先生文

 

鳴呼哀哉

先生其果竟至於此而止邪 先生而止此

小子將復何所仰焉 而其所以崩推隕割者 曷其有旣

上天茫茫而但高 何不聽我之呼而察我之志

藐玆小子 早自丱角之年 奉几杖於左右而以依歸之地也

當時年齡稚弱 志氣昏愚 固不足以測先生之所存

而其冲然德字之可悅而可敬 則已不自覺其心醉也

旣又執經門下 而周旋進退 歲月漸久

則於是益知泰山之高 而丘垤阜陵   宜不可以準擬也

蓋豈非先生之所以得之稟受之初而性情氣魄者

一皆本之於性而發之言語事之間者

無非淳惻怛之所形 故使小子仰而感 感而慕

亦出於心之所激 而又不自知其所以者那

於其自少而奉承家庭之間 則所以致愛 致其樂 致其憂

致其哀 致其敬者 無非發於至情之極 而父母稱之則曰孝

宗黨親戚稱之則曰孝 以至里士友之間

其所以辭者無二也 至其所以處兄之間

則友愛之隆 非人之所可及者 而其所處之難

又有非外人之所知者 故唯有門內之親見其然

而知其高而不可及 則切切轉語於人

而聞者亦皆歎嗟而噓噫也 及夫孝友之實

有以孚於人聞而發於公誦 至於將有以上徹天聽

則蹙然以未安於先生之心 而至於思有以隱避而不敢當者

此使世俗倖倖求名之輩 亦怛然少知感而愧之也 早事文藝之學

著名當世 而又發迹屋 以門戶之榮 此固世俗之所慕

而在先生則餘事也 親有道 洄古人

其所謂學問者 實與吾前日之躬行 有以暗符 而心獨覺其憙憙也標霜潔望之儼然 而尤嚴於進退出處之幾 德山之千層壁立也馨德蘭薰 卽之也溫 而仁義在躬 道德慱洽 退溪之萬頃止水也

優游乎二老先生之間 而得之於觀望膽想之際 至於見益進德益就則其規模氣像 亦有與曩時之云云者有不得不異者也 曾試於星黌 而又得錦溪黃先生之適來刺是州 聲相應氣相求 遂成同人之契 金不足喩其利也 相與讀八卷朱子之書 而尤有味於主敬窮理之說 又其所涵養於未發止前之氣像者 實亦古昔聖賢相傳之深肯也 謂庸學語孟之書 舊亦何嘗不熟讀而力索顧其所講說者 終不過乎口耳也 个既脫然而大悟 若醒醉而睡也 學惟貴於深造 何足道其記也 被又穿鑿說者 哀規規之小智也 徒言而又不能存養者 皆是外物之所累也 有所不疑 疑之未嘗不之思 思之未嘗不之得 其未得之也 則至寢食而求之 其得之

也則又眷眷奉持而猶恐其失墜也 故其精思之功 有以窮深乎微蹟 操守之堅 有以確乎其不可和 則如習習春風之被也 千駟之富貴 視之如無有 一箇之取與 必據乎道義也 見人之志學 則樂誨導 而不知沉之在體 聞人之片善 則心好之如已出之不啻也 夫定本立脚之實如許 而學而充之者又如此 而又其發之者 又將沛然而無窮 此先生之學所以體用具備者也 豈徒近世之儒者不可與議亦將追古人之塗轍 而庶幾乎參跂也 素懷惟欲卷而藏之寂寞之濱 世之前奔波倒者 曾不若乎弊也 茂實騰而不可 名聲久荷乎朋友 援引薦拔總皆當世之君子也 國恩日深 民病難忘 而終不可乎不仕之無義 則又之黽勉服事 而窮日乎惴惴也 八薇垣而唯知補拾闕遺之急 在柏府則唯先憲舊章之固守 而不可以私意而貳之也 佐僚天官 則又以綜회人物 進退賢邪 斷以已任 雖復以此積嫌怨之無窮 而其禍將有所不可言者 而皆有所不避也 事之當否 惟問乎義之如何 而義之所安 則坦乎不可撓 由中應外者 無非至誠梱幅之所爲 而初無一毫之有所爲也 堂堂王佐之風 謇謇廷紳之懿也 毅乎其松柏之獨秀 屹乎其鸞鵠之孤峙也 君子所開心而增氣 小人所縮頸而畏忌也 知之者 謂先生何至於甚 不知者 又復胥動無理之談 以乎罵也 小人口之罔極 自古而莫不然 畢竟何有於曠然之胷次也 鏡湖煙月 長八洛陽之羈懷 故國蓴鱸 不禁遠客之歸思也 吾何此棲棲 言必及而與喟也 飄風吹其征衣 前路何必問人 十年所願 今始遂也 闢就蕪之田園 開數楹之南窻聊永言乎徙倚也 軒臨十里之半空 却愛野景來斯萃也松與竹其交栽 梅與菊其蒔也 沼寒绿荷踈兩 又復傾耳落階之泉脉 樂亦在乎而枕臂也 一區西溪 奇幽曠 天破慳而地出秘也 擬將誅茅結椽 亦足以逍遙樂玩 願與二三子於焉乎歌詠先生王之道 不知老之將至也 於是人皆知先生之雅趣 膏乎水石 又誰知先生憂國之本心則實未嘗須臾之暫弛也 半夜時回思舊之夢 九重天闕 隔千里其如咫也 望美人吾有所贈之 汀有蘭而岸有也 不唯先生之所不能自已者如是 抑亦有識之相期者甚深 其所以先生爲憂者 則唯以疾病之崇也 顧除乎二豎 世道而再起也 獻訐謨於吾君 救生民之憔悴碎也 否者 明道而授徒 開後來之聽視也 二者將必有一得焉 抑又所恃者 蒼蒼之彼也 豈謂所特者終有所不可特 而使先生遽奇禍之所嬰 福善如何 仁壽如何 天莫而理難揆也 人事時運 兩茫茫其不足詰 亦何所售其藥餌也 邦國慘而失賢 山林寂寞空蒼翠也 君子所為扼腕而悼歎 小人所彈冠而交喜也 此小子斯文之哭 世道之哭哭之不已 而其所以私情哭者 又呼天而不已者也 自惟狂妄輕躁之質 小又早孤而無所學焉 其昏情放縱之甚 實亦無所肖似也 非先生收恤之 誨之 匡直之 又從而振作之 吾知面之生 永不免君子之所棄也 春風庭除之散步 秋

月虛堂之參待也 或執經而尋行 或坐而拱手也 談之諄諄或誨之切至也 上而天命之微 近而人事之誼也 大而經綸之法 切而進修之軌也 論難反覆 必極其歸趣 蓋亦無隱乎爾也 謂我消磨乎客氣 務宜涵泳乎天理也 堅脊梁以勤邁 必先由乎平易也 多面命之慇懃 亦書諭之不置也 惟薄質之 淺率 恐不克乎遵覆也 恩奉戴之罔極 敢心於終始也 但有憾抵死而難忘者 自甲子以後 十年之間 獲進陪於左右者 僅止於四也 綠私門禍患之連仍 未嘗有半歲之無事 雖欲徒步往從之卒業

而不可得焉 而亦豈非微誠之不篤而然也 則每向風而愧恥也 憶昨去歲之秋 高軒暫滯於龜城 蓋將赴嚴召 而病不得而進前 則遂索路傍之村舍而僑寄也 近方士子 咸來拜謁 河小子亦叨半月之執也 湯藥之餘 時獲奉承淸誨 半生疑晦 豁若雲霧之披也

自顧頑鏡鈍之莫變 依舊昔日之庸鄙也 空負十年之育 愧瞻德儀之充粹也 朝轍晝而忘餐 夜參半而不寐也 小子之愚昧 旣盡以胷臆之所存 而仰質而不諱 先生亦之剖析解破 傾倒乎底裏也

謂余長懷索居之歎 子亦無伴而踽踽 盍亦來我乎婆娑林壑之幽遂也 新構精舍 端合宴坐而講道 滿龕遺經 深願與子共入室而齊胾也 禮學精密 不可以不講 而最苦儀禮之難讀 則尤欲與子共數月之論議也 於是小子之不敏 亟欲趨走請而又懼私冗汨不可遽以自脫 則不敢即以奉唯也 然矢心則靡他 唯藏月之是竢也 忽奉而退私 音容邈乎千里也 猶尺書之警誨 得蒙荷乎恩庇也 嗟今焉其奈何忽山梁之摧也 儀刑永隔 不得以複覿 痛心肝之如燬也 何天禍之斯酷 哀萬事之巳矣也 獨念夫墜之茫茫 伊有手者孰是也 弱力不足以承當 恐祇師門之羞辱 然敢不竭其心力   繼之以死也邪 重惟不腆之文 豈敢先生之狀也哉 蓋欲奉之 以求幽堂之銘誌也 日月忽其不居 即遠期之迫邇也 柳車飭而繐具 行路咸其隕淚也 親朋畢其會集 紛奠賻之來致也 矧小子之疇依 痛豈但乎鋒刺也 奉時羞以羅前 薄寫情而代贄也 奠單杯而痛哭 交兩之涕泗也 幸先生之不昧 有以鑑此之誠意也 鳴呼哀哉

 

제덕계오선생문

 

명호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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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자소자 조자관각지년 봉궤장어좌우이이의귀지지야

당시년령치약 지기혼우 고부족이측선생지소존

이기충연덕자지가열이가경 칙이부자각기심취야

기우집경문하 이주선진퇴 세월점구

칙어시익지태산지고 이구질부릉   의부가이준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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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허당지참대야 혹집경이심행 혹좌이공수야 담지순순혹회지절지야 상이천명지미 근이인사지의야 대이경륜지법 절이진수지궤야 론난반복 필극기귀취 개역무은호이야 위아소마호객기 무의함영호천리야 견척량이근매 필선유호평역야 다면명지은근 역서유지부치야 유박질지 천솔 공부극호준복야 은봉대지망극 감심어종시야 단유감저사이난망자 자갑자이후 십년지간 획진배어좌우자 근지어사야 록사문화환지련잉 미상유반세지무사 수욕도보왕종지졸업

이부가득언 이역기비미성지부독이연야 칙매향풍이괴치야 억작거세지추 고헌잠체어구성 개장부엄소 이병부득이진전 칙수색로방之村舍而僑寄也 근방사자 함래배알 하소자역도반월지집야 탕약지여 시획봉승청회 반생의회 활약운무지피야

자고완경둔지막변 의구석일지용비야 공부십년지육 괴첨덕의지충수야 조철주이망찬 야참반이부매야 소자지우매 기진이흉억지소존 이앙질이부휘 선생역지부석해파 경도호저리야

위여장회색거지탄 자역무반이우우 합역래아호파사임학지유수야 신구정사 단합연좌이강도 만감유경 심원여자공입실이제자야 례학정밀 부가이부강 이최고의례지난독 칙우욕여자공수월지론의야 어시소자지부민 극욕추주청이우구사용골부가거이자탈 칙부감즉이봉유야 연시심칙미타 유장월지시사야 홀봉이퇴사 음용막호천리야 유척서지경회 득몽하호은비야 차금언기내하홀산양지최야 의형영격 부득이복적 통심간지여훼야 하천화지사혹 애만사지사의야 독념부추지망망 이유수자숙시야 약력부족이승당 공기사문지수욕 연감부갈기심력   계지이사야사 중유부전지문 개감선생지상야재 개욕봉지 이구유당지명지야 일월홀기부거 즉원기지박이야 유차칙이세구 행로함기운루야 친붕필기회집 분전부지래치야 신소자지주의 통기단호봉자야 봉시수이라전 박사정이대지야 전단배이통곡 교량지체사야 행선생지부매 유이감차지성의야 명호애재

 

덕계오선생 제문

한강집(민족문화추진회 번역본에서 옮김)

, 애통합니다.

선생이시여, 과연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마셨단 말 입니까. 선생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셨으니 소자는 장차 누구를 우러러보아야 하며,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아득하게 높기만 한 하늘은 어찌 한번 저의 호소를 듣고 저의 심정을 굽어 살펴 주시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이 소자는 일찍이 어릴 적부터 선생을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의지할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이가 어리고 의지와 정신이 어두워 선생의 내면에 간직한 실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으나, 친근감과 공경심이 일어나게 하는 드넓은 도덕과 기량에 자신도 모르게 심취하였습니다. 그 뒤에 문하에서 경서를 들고 생활하며 세월이 차츰 더 많이 흐르자 높디높은 태산을 개밋둑이나 조그만 언덕으로는 모방하고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알았습니다. 그 어찌 선생께서 타고나신 성정(性情)과 기백(氣魄)이 하나같이 본성에다 근본을 두었으며 말씀이나 행동으로 나오는 것들도 모두 간곡하고 애절한 정감이 드러난 것이었기 때문에 소자로 하여금 우러러 감복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부모를 모실 때 평소에는 사모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에는 즐겁게 해드리고, 병환이 있을 때는 깊이 근심하며, 초상을 당했을 때는 깊이 슬퍼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경건한 마음을 다하는 등 일련의 일들이 지극한 정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시어, 부모가 칭찬하기를 효자라 하고 멀거나 가까운 친족들이 칭찬하기를 효자라 하였으며, 이웃 마을 사람들이나 사우들 사이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 자매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두터운 우애가 더욱 여느 사람이 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 행하기 어려운 행실은 또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므로 한집안의 친족이 그 사실을 보고서 워낙 특별하여 쉽게 따라 갈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바깥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이야기 하였고, 그 말을 들은 자도 모두 감탄을 금치 못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효성과 우애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고 그것이 공공연한 칭송으로 이어져 장차 조정에까지 알리려는 움직임이 있자, 선생의 마음에 쑥스럽고 미안한 나머지 남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림으로써 감히 그 명예를 감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점은 내실은 없이 요행으로 이름을 얻으려는 세속 무리로 하여금 다소나마 뭔가 뜨끔하게 양심에 닿아 부끄러움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문예에 관한 학문을 닦아 당대에 이름이 났고 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가문에 영예를 안겨줬는데, 이는 사실 세속 사람들이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지만 선생에게는 대단찮은 일이었습니다. 만년에 대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옛성현의 연원을 탐구하셨는데, 그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이 실로 자신이 전일에 몸소 행하던 것과 부합되어 내심 기뻐하셨습니다. 준수한 기풍이 서릿발처럼

정갈하여 그 모습을 우러러볼 때 엄숙하였는데, 무엇보다 진퇴와 출처의 도리에 엄격한 것은 덕산(德山 조식(曺植))의 천 층 높은 기상이었습니다. 난초 향기 같은 덕을 쌓아 그 앞에 나아가면 따사로움을 느끼는데, 인의의 도를 몸에 지녀 도덕이 넓고 흡족한 것은 퇴계의 만경 너른 강이었습니다. 이들 두 선생 사이에 노닐며 그 기상을 우러러보고 도덕을 상상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견해가 더욱 진보되고 덕이 더욱 높아지기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와 기상 또한 앞서 거론한 수준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성주(星州) 향교에 학관으로 계셨는데, 그때 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선생(黃先生)이 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의기가 서로 통한 나머지 마침내 뜻이 맞고, 도가 같은 벗이 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함께 8)권의 주자 글을 읽으셨고 무엇보다 경()을 위주로 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설에 맛을 들였으며, 또 마음이 발동하기 이전에 함양하시는 기상은 실로 옛 성현들이 서로 전수한 심오한 뜻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중용》, 《대학》, 《논어》, 《맹자》 등의 글을 예전에도 익히 읽고 애써 탐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당시 강론한 것은 아무래도 입으로만 되뇌고 귀로만 듣는 형식적인 공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미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 크게 깨달아 마치 술에서 깨고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학문이란 오직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문장을 잘 기억하는 것이야 무슨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저 견강부회하여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자는 앞뒤가 막힌 소소한 지혜로서 가련하기 그지없는데, 더구나 말로만 하고 마음과 본성을 수양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외물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애초에 의심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일단 의심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일단 생각을 하면 그것을 터득하지 않은 적이 없었었는데, 터득하기 이전에는 침식까지 잊어버리고 구했으며 터득한 다음에는 또 애지중지 지켜 행여 놓쳐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밀하게 생각하는 공부는 미묘하고 심오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였고, 이미 얻은 것을 지키는 신념은 확고하여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사무를 처리할 때의 엄격한 뜻은 금석처럼 단단하여 빼앗을 수 없고, 사람들을 대할 때의 부드러운 기운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부귀영화는 안중에도 없고 물건 하나를 남에게 주거나 받을 때도 받드시 도의에 따라 하셨습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을 보면 병을 앓고 있는 몸도 잊은 채 기꺼이 가르쳐 인도하였고, 소소한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들으면 자신이 그 장점을 지닌 것보다 더 깊이 좋아하셨습니다. 근본과 기초를 이처럼 튼튼하게 세운 뒤에 도를 배워 그것을 내실 있게 한 것이 또 이와 같았으며, 그것을 곁으로 발산하면 성대하고 충만하여 막힘이 없으셨으니, 이는 곧 선생의 학문이 체용(體用)이 다 구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어찌 근세의 유자(儒者)와는 같은 선상에서 함께 논의하지 못할 정도뿐 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옛사람의 자취를 따라가 그들과 서로 어울릴 만하다 할 것입니다.

본심은 오직 자신의 자취를 거두어 적막한 물가에 숨고 싶을 뿐, 온 세상 사람들이 휩쓸려 추구하는 것들은 헌신짝 보다 더 천하게 여기셨으나, 거룩한 덕행이 드러나 덮어버릴 수 없고 벗들 사이에 명성이 오랫동안 자자하여 이끌어주고 천거한 인물이 모두 당대의 군자였습니다. 나라의 은혜는 날로 깊어지고 백성의 고통은 잊기 어려워 마침내 벼슬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또 정성껏 임금을 섬겨 종일토록 전전긍긍 긴장을 늦추지 않으셨습니다.

사간원에 들어 가셔서는 조정의 잘못된 정사 보완을 급급히 하는 것만 아시고, 사헌부에 계실 때는 오직 과거의 국법을 고수할 뿐 사적인 생각으로 벗어나게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조의 막료로 계실 때는 또 인물을 종합하여 따져보아 유능한 자를 등용하고 무능한 자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심으시어, 비록 이로 인해 끝없는 증오와 원망을 쌓아 그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일의 옳고 그른 기준은 오직 의리상 어떠 한가 따져보아 의리에 맞는 것이라면 자신의 주장을 전혀 굽히지 않으셨으며, 가슴속에서 우러나와 외면에 응하는 일들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충정에 의한 것으로서 애초에 털끝만큼도 가식이 없으셨습니다.

당당한 왕좌(王佐 군왕을 보좌하여 왕업을 이룰 만한 인물)의 기풍이며 강직한 벼슬아치 로서의 미덕은 매서운 추위에 홀로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 같고 드높은 산마루에 우뚝 선 난새와 고니 같았기에 군자는 가슴이 트여 용기가 솟고 소인은 목을 움츠리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대상이었습니다. 선생을 아는 자는 그처럼 지나치게 꼿꼿하게 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고, 선생을 모르는 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퍼뜨려 함부로 비방하였습니다. 소인의 입이 흉악한 것은 예로부터 으레 그랬던 것으로서 드넓은 선생의 가슴에야 그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습니까. 경호(鏡湖)의 안개와 달빛이 낙양(洛陽)의 나그네 가슴에 길이 들어오고 고향의 순채와 농어 맛이 길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금할 수 없게 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여기서 서성거리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말이 그에 미치면 그때마다 반드시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떠나 오실 적에 길 가는 행인에게 앞길의 원근을 물을 것 까지야 뭐가 있었겠습니까. 10년의 소원을 이제 비로소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황폐해진 전원을 일구고 조그만 집의 남창을 활짝 열어놓은 곳에서 읊조리며 배회하는가 하면, 십 리의 허공을 굽어보는 누대 위에서 한눈에 모여드는 들판의 풍광을 좋아하셨습니다. 솔과 대나무를 섞어 심고 매화와 국화를 함께 가꾸어 놓았으며, 맑은 못물에는 차가운 달빛이 잠기고 푸른 연잎에는 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섬돌 위에 떨어지는 샘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는가 하면, 맹물을 마시고 팔베개 하는 청빈(淸貧)의 즐거움도 있으셨습니다. 서계(西溪) 한 구역의 맑고 기이하며 한적하고 툭 트인 경치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기던 곳으로, 장차 그곳에 초당을 얽으면 충분히 소요하고 즐기실 만하였기에 앞으로 두세 문인들과 그곳에서 선왕(先王)의 도를 노래하며 몸이 늙어가는 줄을 모르기를 원해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청아한 흥취가 수석(水石)을 즐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또 누가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본심은 사실 잠시 잠깐이라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한밤중에 지난날 몸담았던 도성의 꿈을 꿀 제 임 계신 천리의 구중궁궐이 지척인 양 가까웠고 임금에게 이 몸이 지닌 물가의 난초와 산기슭의 백지(白지)를 바쳐 올리리라 기원하셨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마음만 그처럼 애절했을 뿐 아니라, 선생을 아는 사람들의 기대 또한 매우 깊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을 위해 걱정하는 사람은 오직 질병이 혹시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서 빨리 병마를 훌훌 떨쳐버리고 이 세상을 위해 다시 일어나시어 우리 임금에게 훌륭한 계책을 올려 초췌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거나, 아니면 도를 밝혀 문인 제자에게 전수하여 후학들의 안목을 트여 주시길 바랐으니, 이 두가지 중에 반드시 하나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한편 믿었던 것은 저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었던 것은 끝내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선생으로 하여금 갑자기 뜻밖의 화를 당하게 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은 무슨 말이며 어진 이는 장수한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천심을 헤아릴 수 없고 이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본디 허무한 저 인사(人事)와 시운(時運)이야 이제 따져 물을 것도 없습니다만 세상의 그 많은 약물을 어디에 써 보겠습니까. 나라는 참담하여 현인을 잃었고 산림은 적막하여 푸른빛만 띨 뿐이니, 군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탄하며 소인은 갓 먼지를 털고 서로 일어나 기뻐할 일입니다. 이는 소자가 한도 끝도 없이 사문의 불행을 곡하고 세도(世道)의 불행을 곡하며 아울러 사적인 정을 위해 곡하느라 또 하늘을 부르짖으며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저는 건방지고 경박한 자질에 다 어릴 적에 또 부친을 잃어 제대로 배운 것이 없으므로 너무도 우매하고 태만하며 방자한 나머지 어디서 저와 비슷한 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선생께서 거두어 돌보고 가르치고 바로잡으며 또 나아가 분발시켜주신 일이 없었더라면 저는 앞이 깜깜한 인생으로서 영원히 군자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 뜨락에서 산보하고 가을달 밝은 밤 텅 빈 마루에서 모실 적에 경서를 들고 행간의 뜻을 탐구하기도 하고 혹은 고요히 앉아 두 손을 맞잡고 있기도 하였는데, 청아한 담론이 진지하시고 정중한 가르침이 간절하였습니다. 위로는 천명(天命)의 오묘한 이치와 가까이는 인사(人事)의 타당한 도리,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절실하게는 덕을 쌓고 몸을 닦는 기준에 대

이러니저러니 되풀이해가며 말씀하시어 반드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셨으니, 이 모두 소자가 모르는 점에 대해 숨김없이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저의 객적은 혈기를 소멸하려면 천리(天理)를 깊이 탐구해야 하며 등골을 꼿꼿하게 펴고 앞으로 매진하려면 반드시 먼저 평이한 길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대면하여 간곡하게 말씀하신 적이 많았고 편지

로도 부단히 일러주셨습니다. 다만 저의 자질이 못나 행여 그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며, 그 무한한 은혜를 받들어 감사드리는 마음은 어찌 감히 시종여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죽더라도 잊기 어려운 유감이 있는데, 지난 갑자년 (1564, 명종 19) 이후 10년 동안에 선생을 찾아가 곁에서 모신 적이 겨우 네 차례에 그쳤다는 점입니다. 이는 제 가문에 재앙과 우환이 거듭되어 반년도 무사히 넘어간 때가 없었으므로 비롯 선생을 찾아가 모시고 학업을 마저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는 합니다만, 한편 어찌 정성이 두텁지 못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늘 고개를 들어 생각할 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생각하면, 작년 가을에 선생께서 잠시 구성(龜城)에 머무셨는데, 그것은 장차 임금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올라가시다가 병으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길가의 촌가를 구해 임시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가까운 지역의 사자(사子)들이 모두 찾아와 배알하였는데 소자도 반달 동안 모셨습니다. 탕약을 살펴보는 여가에 수시로 고매한 가르침을 받들어 반평생의 의심들이 구름안개가 걷히듯 말끔히 풀렸습니다만, 스스로 돌아볼 때 무딘 자질을 변화할 수 없어 범상하고 속스러운 모습이 지난날 그대로였습니다. 10년의 가르침을 헛되이 저버려 순후하신 덕과 위의를 우러러보기가 부끄러운 나머지 아침에는 한낮이 되도록 밥 먹을 생각을 잊어버리고 저녁에는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소자는 이미 가슴속의 의문을 남김없이 다 여쭈었고 선생께서도 저를 위해 저 밑바닥까지 철저히 분석하여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외로운 생활을 한탄한 지 오래되었고 그대도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 외로우니 어찌 내 곁으로 와서 한적하고 깊은 산골에서 지내보지 않으려는가. 정사를 새로 짓고서 한가로이 앉아 도를 강론하고 벽장에 가득한 옛 경전을 그대와 함께 한 방에서 음미하고 싶네. 정밀한 예학(禮學)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무엇보다 의례(儀禮)》를 읽어 내기 어려우니 더욱 그대와 함께 몇 달 동안 이 책을 가지고 논의했으면 하네.”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무능한 소자는 당장 계속 곁에서 모시면서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또 세상일에 파묻힌 몸이 갑자기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기에 감히 즉시 응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확고하여 적절한 시기가 되면 결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 선생의 목소리와 모습이 천리 너머 막혀 있긴 하였으나 편지로 가르침을 주시는 보살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아, 이제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으니 말입니다. 선생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으니 심장 간장이 불에 타는 듯 아픕니다. 하늘의 재앙이 어찌 이리도 혹독한지 만사가 이제는 끝났습니다. 생각건대, 선생의 끊긴 학문을 이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소자가 힘이 약해 그 책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여 사문(師門)에 욕을 끼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만, 어찌 감히 저의 이 목숨을 걸고 있는 심력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소자의 변변찮은 글이 어찌 감히 선생의 일생을 그려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것을 가지고 묘갈명과 묘지문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어느덧 장례를 치를 때가 되어 상여가 준비되고 상여줄이 갖추어지니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떨굽니다. 친지와 벗들이 모두모여들고 부의가 답지 하는데, 더구나 소자는 이제 누구를 의지한단 말 입니까.

아픈 가슴은 어찌 칼끝에 찔린 정도만 이겠습니까. 제물을 받들어 영전에 올리고 비통한 정을 쏟아 예물을 대신하며, 한잔 술을 바치며 통곡하니 두 뺨에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행여 선생의 영혼이 계시거든 제 이 정성을 굽어 살펴 주소서, , 애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