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湖 吳長 硏究
慶尙大學校 漢文學科 徐郞(碩士學位論文) 2005년
指導敎授李相弼
目次
I. 序論..............................................................................................................................3
II. 生涯와 師友關係....................................................................................................... 3
1. 家系와 生涯............................................................................................................. 3
2. 師友關係................................................................................................................. 12
III. 學問性向과 現實對應................................................................................................26
1. 敬義之學의 ........................................................................................................... 26
2. 學問의現實適用...................................................................................................... 32
IV. 文學觀과詩世界........................................................................................................ 41
1.文學觀........................................................................................................................ 41
2.詩世界......................................................................................................................... 43
1) 自然과의 融和와 心性修養....................................................................................... 44
2) 敬義精神의 具現.......................................................................................................54
V . 結論.......................................................................................................................... 65
<參考文獻> ................................................................................................................... 69
ABSTRACT A Study on Oh-Jang Seo, Rang Department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Graduate School Gyeongsang National Univers y Supervised by professor Lee Sang-pill Sa_ho(思湖 Oh Jang(吳長 1565-1617), a son of Deok-gye(德溪) Oh Geon(吳健 1521—1574), was a lit *ati of Nam-myung(南冥 such as Su—oh—dang(守吾堂 Oh, gan(吳j .Han—gang(寒岡 Jeong, Gu(鄭 • Gak~jae(覺齋 Ha, Hang(河洗 • Nae-am(來庵 Jeong, In-hong(鄭 仁弘). He was influenced from his family and academic succession and the s dy tendency of Gang-woo(江右 area, so it seems that he succeeded the scholarship of Nam-myung naturally. He had various relations with his wide friendship, and was highly repaid among other scholars. In the tendency of learning, he gave effort to put the Nam-myung s theory of 'Gyung-eui-ji-hak(敬義之學),in practice because he respect Nam-myung from his boyhood. The main idea of Nam-myung were the internal cultivation and social practice with the spirit of Gyung(敬 and Eui(義).Sa—ho attached great importance to Nam-myung's practical learning spirit of 'Eui(義)'too. So he showed the model of true scholar w h his raising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in active when occured The Im-jin War(壬辰倭商L). Further, he paid attention to the life of people and had the strict moral standard in the problem of gaining official rank. So he once was be hate from King or other parties' officers with his spirit of plain speaking. When occurred Gye-chuk_ok_sa(癸B:獄事) Sa-ho supported in active the Han-gang(寒岡)'s opinion which of single—minded devotion for Young-chang prince(永昌大君).Moreover, he wrote the memorial to the Throne of [Sin-gu—Jeong—Dong—gye—so(r 伸敎鄭桐溪疏j)] when Dong-gye(桐溪 Jeong, Ohn(鄭M) was exiled to Je-ju island for the matter of Mu-jin—bong-sa(甲寅封事).A1 ough it was so fatal action to him at that time, he never could tolerate those s uation because of his moral standard to be called 'Eui(義 Justice)’ and he thought that it was his mission to correct Non-justice(不義 of royal power, Sa-ho's these ird:egrity mind and behaviour caused to be vanished from his rival faction and exiled to To—san(렸山) in the Hwang-hae province(黃海道).A er vanishment, he still stuck to the sincere reading and learning attitude to the last in spite of isolated s nation in remote place, and was dead in 1617 for his deep-rooted disease. I could find Sa-ho's mental life in his literary work. He thought Hi — that a literary is an output from one's vast stock of knowledge in mind, so he liked the Classical Style(古文 which should be useful utulility for the people not for individual pedantic means. The feature of Sa-ho's poetry world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A harmony with nature and individual vh*tue cultivation. 2. A imbodiment of Nam-myung's spirit of 'Gyung-eui(敬義)' through sticking a grand plan and not bended principle. It could be find that the common idea in his poem world, Nam-myung's spirit of 'Gyung—eui' has a deep relation with his scholarship. Like the above-mentioned the thing of Sa-ho's whole life pursuit was the practice in real world from academic idea. Moreover, the resalt of this research I could find that Nam-myung's spirit of 'Gyung-eui' was succeeded to his literati and private pupils time by time after the death of Nam—myung. .
星瑚 李灌(1681-1763) 의해 ‘영남의 양대 산맥’ 같은 인물이라 일컬어 退溪 (1501-1570) 南冥 曹植(1501- 72)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 시기에 이르기까지 후학들에 의해 존모되어 왔고 해방이후 이들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퇴계에 관한 연구가 월등히 많은 편이나 남명에 관한 연구도 80년대 이래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남명의 사상과 정신은 19세기까지는 물론 지금까지도 영향이 남아 전해지고 있으나 남명학에 관한 연구는 남명과 그의 직전 제자들에게만 편향 되어 있는 편이다. 2) 19세기까지 남명의 사상이 전승되는 사이에는 많은 제자와 사숙인이 있었던 바 이에 대한 연구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思湖 吳長(1565-1617)은 德溪 吳健(1521- 1574) 아들이자 남명의 대표적인 직전 제자들이라 있는 守吾堂 吳僩 • 寒岡 鄭逑 • 覺齊 河沆 • 東岡 金宇顒 • 來庵 鄭仁弘 등의 문인이다. 思湖는 가계와 사승관계 당시 江右地域의 학문성향 동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럼게 남명의 학문을 게승한 것으互 생각된다. 思湖는 남명학파의 영향권에 있는 山陰에 거쳐하며 敬義精神에 입각한 현실대응 방식과 학문자세를 지님으로써 名聲을 얻었던 인물이다. 思湖는 受學한 학문을 바탕으로 혼란한 정치현실 속에서도 ‘義 ’ 실천을 위해 노력하여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는 용감히 倡義하였다. 癸丑獄事로 永昌大君의 처러문제가 대두되어 정국이 '全恩’ ‘討逆’으로 같라지자 思湖는 全恩의 의견에 동조하고 桐溪 鄭蘊 [甲寅封事]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되자 적극적으로 伸寃에 나서기도 하였다. 때문에 護逆의 무리로 지목되어 황해도 兎山으로 유배 갔으며 그곳에서 一生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1)李灑 星湖 1 東方人文條:"中世 陵退溪生於小白之了南冥生於頭流之 東 皆南之地 上道尙仁 下道主義 儒化氣節 如海濶山高於是乎文明之極矣"
2) 李相弼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 1998, 3-7 參照.
이렇게 思湖는 중대한 사건의 전개 과정외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로 상당히 뚜렷한 행적과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 본 연구는 思湖의 사상과 학문성향이 현실 속에서 추구되고 실현된 구체인 양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집필된 것이다. II장에서는 그의 [行狀] • [年譜] 등을 자료로 하고 교유인들의 문집 남아 있는 기록을 참조하여 가계 • 생애 - 사우관계 행적을 살피보고자 한다. III장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남명의 ‘敬義之學’ 이 思湖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계승되어 나타나는지룰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현실생활 속에서 적극적으로 경의정신의 실현에 노력했던 思湖의 모습을 면밀히 조명해 보고자 한다. IV장에서는 그의 文學觀을 검토하고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정신세계를 고찰해 보겠다. 특허 그의 학문성향에 드러난 ‘경의정신의 현실적용’ 관련하여 ‘自然과의 融和와 心性修養’ ‘敬義精神의 具現’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본고는 81년(正祖 5) 西溪書院에서 간행된 "思湖集" 을 연구의 기본자료로 삼았다. 분량은 8권 4책 이다.
3) 지금까지 思湖 吳長에 관한 연구로는 李政喜의 "思湖集" 解題가 南冥學硏究 13輯에 실려 있는 것이 전부이다.
II. 生涯와 師友關係
1. 家系와 生涯
(가) 家系
思湖 吳長은 1565(明宗 20) 7월 3일 子時에 星州 柳村里의 外家에서 태어났다. 字는 翼承이며 본관은 咸陽이다. 그의 시조는 高麗朝에 左僕射틀 지낸 吳光輝이다. 오광휘는 文科에 狀元 하였고 契丹 침입 시에는 金就蠣, 趙沖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물리쳐 咸陽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文度이다.
6대조인 吳德秀가 居昌에서 山陰의 石里로 移居하여 터전을 마련하였다. 曾祖父 吳軾과 祖父 吳世紀는 모두 儒學을 공부하였으나 벼슬한 적은 없었다. 다만 조부 오세기에 대해서는 다옴과 같은 기록이 있다. 文行이 있으셨으나 일찍 둘아가셨다. 입으로는 나쁜 말을 함이 없으셨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다툼이 없으셨다. 마을 사람돌이 府君을 가리켜 ‘탱화 속외 부체[頓中佛]’라고 하였다.4)
이로 보아 오세기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名望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 떠남으로 인해 文名을 떨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부친 德溪 吳健(1521-1574)은 南冥 曹植과 退溪 李滉에게 受學하였던 當代의 巨儒였다. 특히 南冥學派의 座長格 인물로 追從하는 이들이 많았다. 매우 剛斷있는 성품이어서5) 독서를 함에 있어서도中庸 매년 천번씩,
4)吳健 德溪集 卷7, [行狀] :"有文而早世口無惡言在夷不爭間 閭里人指爲幀中佛"
5)吳健 德溪集 卷7, [行錄] :"先生入淨水寺讀書前後十餘年閉門危坐凝然不動 晝不變膝夜不交睫或低聲讀誦或靜嘿對案未嘗與寺僧交一言"
[大學] 일천번 기타 經史는 적어도 사오백 번은 읽었다고 한다6) 강단 있는 성품이 아니면 쉽게 있는 일이 아니다. 덕계는 평소 淳朴하고 質實한 측면과 일을 만나면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고 흔들리는 바가 없는 두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義 ’라고 판단되면 조금의 흔들림 없이 과감하게 설천하였다.7) 다음 글을 보면 덕계의 이런 모습이 아들 思湖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언에 발탁되어) 처음 관청에 들때에 서리가 감탄하며 말하길 "先大夫와 꼭 닮았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아버지와 자식이 단지 생긴 모습만 담았다는 것이 아니라 풍기는 氣質的 성향도 닮았다는 의미르 이해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星州 李氏로 生員 李光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둘은 夭折하였고 막내인 思湖만 獨子로 남게 되었다. 외조부 李光은 효행과 학문으로 慶尙遺 觀察使 金安國(1478- 43) 천거 받았던 인물이다.9) 일찍이 딸을 賢士에게 시집 보낼 것이라고 말했는데 덕계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딸을 시집보냈다 10).이광의 형 李煥의 사위가 鄭思中으로 寒岡 鄭述의 부친이다.
6)吳健 德溪集 권7 [行錄] :"吾於中庸 則讀不知遍數 大學則約千餘遍 諸經史俱 不下四五百遍"
7) 李相弼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高麗大學校 學位論文 1998, 79쪽 參照.
8)李源祚 [凝窩集] 卷21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思湖先生吳公行狀' :"初入臺聽 老吏嗟嘆曰 恰肖先大夫"
9) [中宗實錄] 卷32, 13年3月 26日 條:[慶尙道觀察使金安國 薦擧曰……生員李光 居星州 小失父 獨與兄居 孝養母與祖母 朋友有信 解識天文地理"
10)吳健 [德溪集] 年譜 1548年 條:"李公嘗曰 此女賢必嫁寶士 時柳公公掉爲山 陰倅 與李公內外兄弟也 一日 遇李公家謂曰欲朮士人之賢者 無如吳某 吾久在其縣 熟其爲人 德行文藝 非流輩人也 李公歸之 女 "
11)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옴과 같다.
李枝成 --李換一 女=鄭思中…—鄭逑
=李枝成 李光一 女=吳健一—吳長
조모는 八莒都氏로 都永康의 딸이다. 덕계가 14세 때(1564년 ) 외삼촌 都良 弼에게 周易 배웠던 것12)으로 보아 학덕이 있던 집안임을 있다. 위의 家系暑 간략히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그럼1. 家系圖 >
始祖 吳光輝............從聞- 軾- 世紀(=八莒 都氏 ) - 健(德溪 =星州李氏:思湖 =成天祉 =成天 =姜大延) - 長(思湖)(=四川李氏:龜巖 李楨의 曾孫女: 淀, 女=姜大延 )-淀
* 世綱- - — 俊(茅窩) —慶遠-懈
俔(義堂, 壬亂倡義)
僩(守吾堂 : 德溪 • 南冥門人, 思湖의 스승)
侃 (訓練奉事)
(나) 生涯
思湖는 5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 때는 文理가 통하였고 기억력도 상당히 뛰어나 오랜 시간 뒤에 물어도 잊어버린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글자를 익힐 때, 큰 빗자루를 맑은 물에 적셔 마루 바닥 한 칸에 한 글자씩을 쓰자, 보는 사람마다 경탄하였다고 한다.
12)吳健 [德溪集] 補遺 張福樞撰 '德溪先生神道碑銘' :"甲午受易於內舅都上舍"
경상도의 都事가 縣에 행차하였다가 思湖의 이틈을 듣고 불러서 音자暑 쓰게 하고 시험삼아 점을 찍어야 곳을 도포로 가렸는데 思湖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붓을 적셔 도포 위에 점을 찍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뛰어난 면모를 보이던 思湖는 7 때부터 본격적으至 從叔父인 守吾堂 吳僩(1546-1589)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수오당은 思湖를 두고 "이 아이는 총명함이 평범하지 않아 권면하고 감독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힘써 게으르지 않으니 뒷날 성취하여 장차 홀륭한 대군자가 것이다.(13)" 라고 하며 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8세 (1572 선조 5년) 부친 덕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吏曹銓郞의 천거문제로 인해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덕계는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물러나야 할 때 과감히 물러나는 덕계의 출처를 思湖는 결에서 직접보고 느꼈던 것이다. 덕계가 귀향하자 그의 종유인들이 매일 모여 들었다.14) 집으로 찾아오는 많온 학자들과 자연히 얼굴을 익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직•간접적으로 배우는 바도 많았을 것이다. 思湖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몸이 좋지 않더라도 昏定晨省하던 것을 소홀히 함이 없었고 부친 덕계의 생명이 위급할 때는 목욕재계하고 자신의 생명으로 부친의 목숨을 대신할 있도록 하늘에 기도하였다.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난 뒤에는 매일 家廟에 謁見한 뒤, 어머니께 문안드러고 서재로 가서 공부하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몸을 단속하는 것은小學과 가례를 준거로 삼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생활이 이미 嚴格하고 節度가 있었 다. 1578(戊寅 선조 11)년에는 수오당에게 禮記 近思錄 대해 자주 질문 하였다. 비록 병으로 신음하는 중에도 입으르 읽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不撒晝夜하여 수오당이 매우 깊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고 하니 思湖의 학문에 대한 자세와 열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수 있다.
13) 吳長 [思湖集] 卷7 '年譜' 1571年 : "每稱公曰 此兒 英悟不凡 不待觀督 自力不怠 他日成就 將爲大君子云"
14) 吳健 [德溪集] 卷7, '行狀' :"壬申 先生 病謝仕南歸 溝一小軒 引水爲池…… 從遊之士 日以坌集 相與講討於其中"
학문에 대한 깊이와 관심이 더해 가면서 思湖는 15세가 되던 1579(己卯 선조 12)년에 직접 한강을 찾아가 몇달간 머무르며 性理大全 二程粹言 등에 대해 질의하였으나 전의 병이 재발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옴 해인 1580(庚辰 선조 13)년에 昌寧縣衙로 다시 한강을 찾아가 受學하였고 17세 때도 창녕현아로 가서 四書에서 의문 나는 점을 질문하였다. 思湖는 이 기간 동안 한강에게 수학하면서 儒家의 기본이 되는 四書와 性理學을 층실히 익혀 학문의 바탕을 튼튼히 하였다. 1589(己丑 선조 22)년 7월 思湖는 監司의 請으로 嶺南樓記를 지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인 思湖에게 명승지인 영남루의 記文올 감사가 부탁한 이다. 1601(辛丑 선조 34) 여름에는 임란으로 무너졌던 德川書院과 山陰 鄕校를 重修하자 上樣文을 지었다. 이런 기록들로 보아 思湖의 文名이 嶺南 지역에 널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89 12월 主簿 李虎變의 딸 泗川李氏를 아내로 맞았다. 부인의 曾祖父 副提學을 지냈던 龜巖 李橫(1512- 1571)이었고 덕계와는 남명 • 퇴계 兩門 동문으로 道義之交룰 맺고 지낸 사이였다. 26세 되던 1590(庚寅 선조 23)년에는 남명학파의 큰 기둥 중 두 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우선 한 해 앞의 己丑獄事 때에는 무고로 옥에 갇혔던 守愚堂 崔永慶(1529- 1590)이 獄死하였다. 12월에는 覺齋 河沆이 별세하였다. 특히 깨끗한 선비로 이름난 수우당이 黨爭의 여파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思湖는 현실의 정국에 대해 많은 실망을 느끼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 하였다.
雲氣噴靈雨 구름 기운이 흙비를 내뿜으메
沈沈久未開 어둡고 흐린 날씨 오래도록 개이지 않아
乾坤渾似夜 하늘과 땅이 온통 밤과 같으니
日月幾時廻 15) 일월은 그 어느 때 돌아 올까?
당시 정국은 동서로 분당되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었다. 온갖 비리와 정치적 암투가 만연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천지가 계속 내리는 흙비로 인해 낮도 밤처럼 보이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이 언제 종식되어 밝음이 돌아올 것인지 한탄하고 있다.
다음 해 역시 동서당의 정권교체로 정국이 어지러웠고 16), 다음 해는 辰倭亂(1592, 선조 2)이 일어났다.
思湖는 왜란이 일어나자 從叔父 吳伣과 함께 山陰에서 倡義하였다.17) 7월에는 東岡 金宇顒(1540-1603)의 薦擧로 旅軒 張顯光(1554-1637)과 함께 圃署 別提에 除授되었으나 길이 막혀 行在所에는 이르지 못하고 義兵활동에만 힘썼다. 이 무렵 招諭使 鶴峯 金誠一(1538- 1593)을 만나게 되어 "덕계에게 아들이 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1594(甲午 선조 27)년에는 全州 撫軍司에 있던 世子[光海君]에게 軍資監 判官을 제수 받았고 이듬해(1595년) 鎭安縣監에 제수 되었다.
35세 되던 1599(己亥 선조 32)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년간 현감으로 지냈으나, 귀향 시의 行裝은 단출하여 고을 사람들어 크게 감복하였다. 폐허가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전쟁으로 집안 모두 목숨을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 위로해 주는 백성을 위로하고 민심수습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601년 12월 모친 星州李氏가 별세하였다. 1610(庚戌 광해군 2)년 46세의 나이로 文科 式年試에 급제하였다. 思湖는 모친의 服制를 마쳤던 해에 思湖亭을 지었고, 그 곳에서 進遙自適하며 일생을 마칠 뜻을 가지고 있었다.
15) 吳長 思湖集 卷1 '五月念間天氣蒙霧口占一絶'
16) 李成茂, 조선시대당쟁사 '동방미디어' 2002, 132~138쪽 參照
17) 鄭慶雲 '孤臺日錄' 권1 1592년 5월 22일 條 : "金松庵通文于列邑 定起兵有司 安陰則鄭惟明 成彭年 咸陽則盧士尙 盧士 豫 朴선 山陰則吳倪 吳長 林應聘 丹城則李魯 金景謹 李惟誠 三嘉則盧欽 李屹 朴思齊 宣寧則李雲紀 郭再祐 郭기等也"
18)李源祚 [凝嵩集] 卷21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思湖先生吳公巧狀' :"往謁招諭使鶴峯金先生 先生嘆曰德溪有子矣"
그러나 평상시 모친은 思湖에게 과거를 볼 것을 권유하였고, 진안현감에 제수 되었을 때도 思湖에게 현감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과거에 합격하여 부친의 명성을 잇기를 바랬다.19) 思湖가 은거하려는 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렇게 모친의 간절한 遺命과 부친의 令譽를 드러내러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5월에 刑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이듬해(1611년)에는 司諫院 正言에 제수되 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벼슬이 내려져 1612 (壬子 광해군 4)년 2월 4월 8월 12월에 걸쳐 正言에 제수되었으나 곧 引嫌하여 遞職하였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벼슬이 내려지는 데는 당시 思瑚의 인망이 높았기에 가능했다.
時事가 힘들고 근심스러워 성주께서 좋은 말 구하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시네. 옛 사람의 말에 "신하가 하루라도 관직에 있으면 마땅히 하루의 계책을 다해야 한다."라고 하였네. 그대는 이미 하루의 책임을 다하지 없다면 마땅히 어떤 일을 먼저 할 것인가? 어제 한양에 있는 사람이 편지를 보니 "오군이 가까운 시일에 上京하면 반드시 좋은 계책과 뛰어난 논의로 당대의 耳目을 흔둘 것입니다."라고 하였네. 이것으로 사람들이 그대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가볍지 않음을 볼 수 있네.20)
계속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思湖에게 한강은 힘든 시대를 맞이하여 출사하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하며, 다른 이의 편지를 인용하여 思瑚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음을 드러내었다.
思湖는 1613(癸丑 광해군 5)년 正月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관직에 나아 갔다. 그러나 3월 '癸丑三月初 一日肅謝後啓'를 올려 나라의 온갖 문제점과 광해군의 處事가 과감하지 못한 것 등을 강직하게 이야기하고 인혐하고 물러났다.
19) 吳長 [思湖集] 卷6, [先墓告榮文] "此猶可也 葛若繼父之跡 登名桂籍 爲衰門光之榮 爲最愈乎"
20) 鄭述 [寒岡集] 卷5, [答吳翼承長] :"時事艱虜 聖主求言如不及 古人有言 人臣一日在官 當盡一日之責 君旣不得不盡一曰之責 則當 以何事爲先 昨見京中人書曰 吳君近日上來 必有嘉謨偉論 動一時耳目者 此可以見人之望於君 非輕矣"
6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 되었으나 永昌大君의 獄事로 시국이 불안정하던 때였다. 당시 白沙 李恒福(1556-1618)이 鄭狹을 잘못 천거한 일로 兩司의 핵을 받았다. 思湖는 衆論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백사를 논핵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피혐하고 물러났다.
신이 엎드려 보건데 양사가 이항복이 역적 정협을 잘못 천거한 죄를 바야흐로 논하고 있는데, 대체로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천거하였을 경우에는 그 천거한 사람까지 논핵하는 것은 옛날부터 유래된 규례입니다.… 그러나 다만 신의 체면은 여느 관원과 달라 이미 논핵을 중지하였을 경우 참으로 스스로 범한 잘못이 아니면 재차 논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논의를 중지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논핵하였으니, 대단한 사리가 내재되어 있어서 논핵하지 않고서는 안 되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대간 일을 논의할 때는 적당한 의리와 올바른 시비와 공정한 호오와 알맞은 경중에 합치 되도록 힘을 써야만 인심이 따르고 공론이 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털큼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곧바로 훗날의 페단이 될 것 입니다. 신의 소견이 여기에 있으므로 지금 갑자기 설을 바꾸어 구차하게 동의할 없습니다. 21)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자신의 뜻을 바꾸어 따를 수 없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내었다. 이런 면은 집권세력에게 좋지 않게 보여 8월에는 鏡城判官에 좌천되었는데, 이는 함경복도 변방으로 쫓아내려는 의미가 강하였다.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1월에 남쪽으로 내러왔다.
21)吳長 思湖集 권3, [癸丑六月肅謝後自劾啓] :"伸伏見 兩司方論左議政李恒福誤薦狹賊之罪 蓋薦非其人 幷論擧主 乃是流來規例……而第大臣體面 與庶官 自 有不同 業已停啓 則苟非有自犯之實 固不必更爲提起 而旣停數日 旋復論劾 是未知有 何大段事件 在所不已耶 大凡臺官 於大小論事之際 務有合乎義理之中 是非之當 好惡之公 輕重之宜 然後人心翕服 公議以定苟或不然恐有後弊 臣狷狹之見 有在 於此 今不敢猝變其說 以爲苟同之地 請命罷斥臣職"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서울로 올라오던 桐溪 鄭蘊(1569-1641)을 우연히 金陵의 客館에서 만나 서로 憤慨하며 時事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헤어질 때 思湖는 동계에게 ‘公平正大’ 네 자를 써 주었다. 뒷날 동계는 "이 글자를 일생 동안 적용함에 어디를 가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 나의 친구가 절차탁마의 도움을 것이 생전이나 죽어서나 간격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 로 익승은 죽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22)라고 하며, 당시의 대화를 기억하며 네 자의 가르침을 각별히 소중히 여겼다.
50세 되던 1614(甲寅 광해군 6)년 2월 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 있던 永昌大君을 강화부사 鄭抗이 蒸殺하였다. 이에 동계는甲寅封事를 올려 정항을 목베고 永昌大君의 位號를 追復하여 禮葬을 지낼 것과 廢母論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견을 나타내었다. 이로 인해 동계는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히고 鞫問을 당하였다. 중신들의 옹호와 대변으로 죽음은 면하였지만 제주도로 圍籬安置 당하는 刑은 피할 없었다. 思湖는 太學에 통문을 돌려 동계의 신원을 도모하였다. 嶺南 儒生들과 함께 李惟說(1569-1626) 疏頭로 하고 思湖가 '伸救鄭桐溪疏'를 지었다. 그러나 더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동계 집안의 자제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임금에게 進達되지는 못하였다. 1615(乙卯, 광해군 7)년 思湖가 동계 정온을 구호하기 위해 상소를 올리려고 했던 일을 들은 李爾瞻(1560-1623)은 관학 유생 閔靜을 사주하여 태학에 돌렸던 通文 중에 ‘扶綱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상소하도록 하였다. ‘부강상’이라는 용어의 출처에 대해 탐문하자 三司와 館學에서 모두 思湖를 이야기하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대의 사람들이, 위협에 굴하지 않고 거침 없이 직언하는 인물로 思瑚를 꼽고 있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思湖는 逆黨으로 낙인 찍혀 황해도 兎山으豆 유배되었다.
22)鄭薇 [桐溪集] 券2, '書吳翼承筆帖後書' "此四字 用之一生 無往不足 而吾友切 磋之益 未有間於存沒矣 冀承盖未嘗死也"
토산은 황폐하고 궁벽한 곳으로 생활하기 힘든 곳이었으나 思湖는 후학을 가르치고 득서에 열중하며 학문에 더욱 침잠하였다.
1617(丁己 광해군 9)년 8월 21일 등의 종기로 고생하다 謫所에서 향년 53 세로 타계하였다.
그후 1623년(癸亥) 仁祖反正이 일어난 뒤 思湖와 寒沙 姜大遂(1591-1658) 신원에 대한 건의가 있었다.
지사 金瑬, 특진관 李時發, 검토관 李植 등이 아뢰기를 "광해군이 모후를 폐하려고 할 적에 남원 부사 정온이 疏를 올려 직간하다가 외딴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습니다.……오장의 경우에는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 귀양지에 죽었고 강대진24) 도 직간하다가 오장과 동시에 유배되었으니 의당 포장의 은전이 있어야 할니다."25)
이에 思湖는 承政院 左承旨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에 추증되었으며, 1649년(己丑)에는 사림의 合議에 의하여 西湖書院에 제향되었다.
2.歸友關係
(가) 師承
思湖 吳長의 사승에 대해 白閣 姜銳(1650-1733) '思湖先生文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3) 吳長 [思湖集] 권4, 答文順甫 : "此地深僻 罕有外事 披書靜對 自覺意味"
24) 姜大遂의 初名이 姜大進이었음.
25) [仁祖實錄] 卷3, 1623年 9月 18日 :“知事 金瑬 特進官李時發 檢討官李植等啓 曰光海將廢母后 南原府使鄭蔬 抗疏直諫被窺絶島……至於吳長 以言獲罪 死於 姜大進亦以直論 與吳長同時竄逐 宜有褒嘉之典"
德溪 先生의 아들인 思湖公의 譚는 長이요. 字는 翼承이다. 영특한 재주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로 家庭의 가르침을 입어 학문을 힘써하였다. 弱冠 나이의 나이로부터 守吾堂 ■ 寒岡 여러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독실하게 나아가 닦으니 이름이 날로 드러남이 있었다.26)
어린 시절부터 배움을 받은 守吾堂과 寒岡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이 외에 思湖의 스승으로는 覺齋 • 東岡 • 來庵을 거론할 수 있다. 내암에게 受學하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문집에 보이지 않으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스승의 위치에 있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守吾堂 吳僩(1546- 1589) 덕계의 從弟이자 제자로 후에 남명의 문하에 까지 이르렀다. 남명으로부터 "성품이 简易하고 행동이 高亮하니 ‘南州第一 ’이다.’’27)라는 평을 듣기도 했던 인물이다. 부친인 덕계는 思湖가 10세 때 別世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기에는 힘들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후대의 평가에서는 ‘家學’을 잘 배우고 따랐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28) 이러한 평이 나올 있었던 근거는 바로 수오당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 우리 숙부의 학문과 덕망과 행실은 모두 우리 선친의 문하에서 나온 바이다. 족히 세상에 우뚝 었었으나 하늘은 숙부께서 세상에 베푸는 것을 아껴서 숙부를 가려지게 하여 드러남이 없게 하였다.… 옛날 내가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숙부께 수학하여 평생의 은혜를 입었다. 사우와 부형의 의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진실로 잊기 어렵다.29)
26)吳長 [思湖集] , [思湖先生文集序]:"其胤子思湖公 諱長 字翼承 以英特之才 超邁之質 襲訓家庭 銳意學問 自弱冠游於守吾堂寒岡諸先生之門 慥慥進修 華聞日彰"
21)吳僩 [守吾堂實紀],附錄 "墓碣銘" :"曹先生嘗稱之曰 性簡行高 南州第一人也"
28)李源昨 [凝窩集] 卷21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思湖先生吳公行狀':"自幼 濡染於家庭 薰炙於師門"
林眞怤, [林谷集] 卷6, '祭吳思湖直長' :"早趨家庭 長從師友 學術文聲 世罕其偶"
權濤 [東溪集] 卷7, '祭吳思湖長文' :"承家庭訓 發憤悱志 得師友助 求道於邇
29) 吳長, [思湖集] 卷6, '又祭墓文' : "嗚呼 我叔父之學 之學 之行 俱出於我先考之門 足以有立於世 而天嗇其施 使之泯泯無 所著……昔我小孤 受業於叔父 平生受恩 師友與父兄之義 俱在 而固難忘也"
祭文에서 思湖는 수오당의 학문근원이 부친인 덕계에게서 비롯되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思湖는 수오당을 "맑온 계곡 가의 차가운 돌의 성품이며 오래된 주발의 흰 얼음 같은 자태" 30)이라고 묘사하였다. 수오당의 淨潔하여 더러움을 용납하지 않는 성품을 이야기 한 것인데, 松灘 鄭弘緖(1571-1648)가 "내 思湖를 생각하면 맑은 모습이 이슬처럼 차갑네.[我憶思湖老 淸標沆瀣寒]" 31)라고 한 것과 유사함이 있다. 수호당의 성품에 思湖가 많은 감명과 영향을 받은 것으 로 생각된다. 寒岡 鄭述(1543-1620) 從姨母夫 德溪 吳健에게 執經師事하여 학문의 터를 잡은 뒤에는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여 兩賢의 장점을 두루 수용하여 심화하였던32) 인물이다. '年譜'에 의하면 思湖는 15세 때부터 한강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思湖가 한강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것은 15세부터이나 만남은 더 오래 전이었다. 우선 덕계는 한강의 종이모부이자 스승이었다. 그러고 思湖가 태어난 柳村은 한강이 태어난 곳이었으며 思湖가 부친상을 당하여 건강이 좋지 않자 한강이 救護해 주었다. 그리고 덕계의 초상 때 한강이 護喪이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思湖와 한강의 만남은 상당히 일쩍부터 시작되었으며 관계 또한 매우 각별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思湖가 한강에게 받은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은 思湖의 性理學에 관한 기초틀 잡아 주었으며33),
30) 吳長 [思湖集] 卷1, '挽堂叔守吾堂' : "玉樹霜風急 天遠莫知 淸溪寒石質 古椀白冰姿 眞實由天性 沈潛匪外爲 斯人今遠去 此別再難期"
31) 鄭弘緖, [松灘集] 卷1 <追次吳思湖寒字韻>
32) 李相弼 '寒岡의 學問性向과 文學', '南冥學硏究' 創刊號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1, 183-196쪽 206-207쪽 參照. 33) 思湖는 15세부터 17세까지(1579-1581 ) 한강에게 왕래하며 '性理大全' '二程 粹言', 四書등에 대해 질의하였다. 13세 때수오당에게 '禮記' '近思錄' 등에 대해 질문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약간의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는 어느 정도 성숙하여 한강에게 사사하면서 이루어진 듯 하다.
군자가 덕을 닦는 방법으로는 ‘敬以直內 義以方外’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강조34) 하였다. 思湖에 대한 한강의 두터운 믿음은 다음 글에 드러나 있다.
나라에 역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항상 멀리 물러나 있는 것이 미안했었는데 요즘 또 그 일이 母侯와 관련이 되어 성상께서 걱정하고 상심해 하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늙고 병든 신하로서 한번 올라가 도성의 문밖에서 위안해 드리는 충정을 표하고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더 들었네.…어쩔 수 없이 짧은 疏箚에다 성상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을 토로하고 그 말단에 나의 소견을 대략 언급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 樟으로 하여금 승정원에 올리게 하였네. 장이 혹시 연고가 있을 경우에는 櫧가 대신 올릴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櫧도 연고가 있다면 그대가 대신 올려줬으면 하는데 그대는 처해있는 혐의 때문에 스스로 올릴 없지 않겠는가. 과연 어떠한가? 35)
당시 ‘癸丑獄事’ 인하여 나라가 시끄러운 상태였다. 특히 永昌大君의 일은 극히 예민한 문제로 선뜻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강의 아들조차 時議를 두려워하여 疏를 올리지 못했다.*36) 그런 위험한 문제에 한강은 자신의 아들이나 조카가 문제가 있을 경우 대신 올려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思瑚의 성품과 자신에게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을 것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애정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신임하던 思湖의 訃音을 듣고 "우리 익승이 이런 상황에 이르렀단 말인가.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네.’37) 라고 것은 단순한 상투적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4) 鄭逑 寒岡集 卷5, <答吳翼承長> :"易曰 敬以直內 義以方外 君子懋德之要 孰加於此 唯於此而眞積力久 然後可以承先人之餘慶 而長保無窮矣"
35) 鄭逑 卷5, <答吳翼承長> :"吾自聞顧有逆變 常以退在爲未安 近又聞事 涉宮闈 聖上憂傷 老病舊臣 尤不可不一上去 伸一慰於國門之外而歸 ……不免奉小 疏陳情 下端略及鄙悃上送 令樟呈於承政院 樟或有故 則櫧可以呈之 櫧亦有故 則君則以形跡之嫌 不能自呈否 如何如何"
36) [光海君日記] 卷72, 5年 11月 10日條: "疏旣封進 而卽歸星州待命 適逑子樟在都 下取見其疏 恐被大禍 遂留疏不上"
37)鄭述 [寒岡集] 卷5, <與朴君秀文매화나무 영> :"聞言痛哭' 心腸如割"
覺齋 河沆(1538- 1590)은 남명의 문하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이다.38) 남명에게 <小學>과 <近思錄>을 배웠으며, 특히 <소학>은 배운대로 잘 실천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小學君子’라고 불렀다.39)
각재의 실천적 학문자세를 思湖가 매우 欽慕하였음은 다음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닭이 울 적에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일찍부터 바랬는데 孶孶夙願在鷄鳴
학문을 함에는 요컨대 마땅히 하나의 정성을 세워야한다네 爲學要當立一誠
이 날 은근히 눈앞에서 가르침 받들고 此日慇懃承面命
다음 날 아침 내 마음을 살펴보려 한다네 明朝準擬察心情40)
일찍부터 ‘닭이 울 적에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바랬다’ 것은 각재의 <小學>을 바탕에 둔 실천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의 정성을 세워야한다’ 것은 학문하는 마음가짐이다. 結句는 각재의 학문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전수 받고 난 뒤의 자신은 前과 다름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思湖는 각재가 은거하여 수양하고 의를 닦는 것을 존경하여 비교할 이가 없다고 하였으며41) 자신에게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내려 道義로 이끌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다.42) 각재는 思湖에게 학문의 요체로 ‘中正’ 을 강조하였으며
38) 河萬興 <覺齋 河沆의 學問과 詩世界> 慶尙大學校 碩士學位論文 2002. 9-11 參照.
39) 李相弼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8, 83쪽 參照.
40) 吳長 [思湖集] 卷1 <次覺齋韻> 其二
41) 吳長 [思湖集] 卷2, <挽河覺齋> 其一 ‘德義’ : "淸修味淡泊 獨趍名利場 隱居行其義 闇然而日章 我閱世間人云誰夫子方" 42) 吳長 [思湖集] 卷2, <挽河覺齋> 其二 "情義’:"哀哉吾夫子 愛我殊珍重 引我道義門 德音貽種種……
그것이 없는 배움은 " 口耳之學일 뿐이라고 하였다.43) 각재의 가르침을 다음 시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 때의 명예는 모두 헛된 울림 一時名譽摠虛鳴
학문하는 바는 본래 뜻을 성하게 하는데 있는 것 所學由來在意誠
이제부터 그대가 핵심을 잡았다고 알려주는데 報道從今巴鼻執
그렇다면 항상 깨어 밤낮으로 中情을 살펴야하리 惺惺日夜察中情44)
口耳之學을 통해 얻는 명예는 한 때의 것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참된 학자는 ‘誠’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에 정신을 기울여야 한다. ‘誠"하기 위해서는 밤낮을 떠나 항상 정신을 ‘惺惺’하게 하여 中情을 살펴야 한다. 각재의 가르침은 남명이 ‘惺惺子 ’를 차고 다니며 ‘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지 않고자 했던 수양자세와 일맥상통한다. 東岡 金宇顒(1540-1603)과 思湖의 관계에 대해 기록이 많이 보이지는 않으나 祭文에 어려서부터 아낌을 받았고1584(甲申 선조 17)년 가을에는 한강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45) 또한 壬辰倭亂이 勃發하자 思湖는 동강의 추천으로 旅軒 張顯光과 함께 司圃署 別提에 제수되기도 하였다.46) 이는 일찍부터 동강이 思湖의 성품과 자질을 살펴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思湖는 동강이 평소 사사로움을 세우지 않고 벼슬할 때는 곧고 바른 도로써 하며 의견을 開陳할 때 ‘正色危言’하던 자세를 존경하였다47).
43) 河沆 [覺齋集] 卷上 <奉和吳翼承長> 其三 :"爲學貴中正不然徒口耳欽君有美 質此去有終始"
44) 河沆 [覺齋集] 卷上 <謝吳學士翼承投贈> 其二
45) 吳長 [思湖集] 卷6, <祭東岡先生文> :"小子獲奉 實自童蒙……憶在甲申 孟秋岡舍 操凡請敎 願策駕下"
46) 李源昨, [凝窩集] 卷21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思湖先生吳公行狀> :"壬辰東 岡金先生 因朝家探訪人材 以張旅軒 及公同薦 除司圃署別提"
47)吳長 [思湖集] 卷6, <又祭東岡金先生文> 代人作:"先生 上不色從 下不私植 立朝四十年 必以其道 其公者與 不爲剛者翕翕 不爲憊者墨墨 峩冠大帶 正色危言而定國論於千百載之後 其直者歟"
思湖가 正言의 자리에 있으면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直言하던 것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였음을 볼 수 있다. 來庵 鄭仁弘(1536-1623)은 仁祖反正 당시 賊臣으로 처형된 내암 당대 인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내암의 흔적을 없애버렸고 후대의 자손들은 先祖의 명망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내암과 관련된 자료를 刪削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思湖와 내암의 관계도 밝히기 힘든 측면이 많다.
諫議 吳長 또한 弘에게 대적한 사람이다. 계축년 議論을 올려 바름을 지켜 다른 의견을 세웠기에 북쪽으로 귀양가서 죽었다.48)
思湖의 절친했던 龍湖 朴文 木英의<行狀>에 있는 내용이다. 내암을 적으로 간주하여 관련성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나 몇가지 측면에서 서로가 사제관계임을 추측해 있다.
첫째 思湖는 덕계의 아들이자 수오당 • 한강 • 각재 • 동강의 문인이다. 둘은 모두 남명의 문인이므로 思湖가 내암과 무관한 관계로 지냈다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또한 <표1>을 살펴보면 思湖가 평소 交遊하며 절친하게 지내던 인물 들 중에서 내암 문인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내암의 제자 感樹齋 朴汝樑(1554-1611), 孤臺 鄭慶雲(1556-?), 迂溪 盧士尙(1559- 1598), 景齋 朴선(?-1597), 藍陰 姜鱗(1568-1619)과는 24세 되던 1588(戊子 선조 21)년에 道義之交를 맺고 서로 勸勉하였다.49)
서로 돈독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대 정경운은 내암에 대한 존모가 득실했던 인물50) [孤臺日錄]에 思湖에 관한 기록이 많다.
48) 朴文木英 [龍湖集] 卷4,安克孝 撰 <行狀> :"吳諫議長 亦敵於弘者也 癸丑獻議 守正立貳 北謫以死 ’’
49) 朴汝樑 [感樹集] <年譜> 1588年 : “先生三十五 與盧公士尙 朴公선 鄭敎官慶雲 吳思湖長 姜校理鱗 爲道義交 益篤切偲
之工"
50) 고대는 내암에 대한 마음을 <孤臺日錄> 곳곳에서 표하고 있다. ‘先生’이라는 칭호를 꼭 붙이는 것은 기본이며, 고을을 방문한 내암에게 병으로 인사 하지 못하자 ‘一生之恨 ’이라 하였다. 또한 내암에 대해 德宇의 漂然함이 程伊川과 다름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내함을 모함하는 疏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思湖도 진안현감으로 제수되자 고대에게 牧民官으로 필요한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51) 고대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이 남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이렇게 思湖와 고대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思湖集] 에는 고대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후손들이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내암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두 刪削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思湖가 내암과 관련이 없다면 이런 자료롤 없앨 필요가 없다. 관련 자료를 없앰으로 오히려 관련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梁弘樹가 내암을 비방하는 소暑 을리자 내암의 문인들은 양홍주가 같은 고을에서 나온 것을 슬퍼하여 陳疏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52) 製疏를 담당했던 孤臺는 思湖를 찾아가 疏事에 대해 의논하였다.53) 思湖가 내암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고대가 疏事에 관한 일을 思湖에게 의논할 필요가 없다. 특히 당시 思湖는 모친상 중이었다. 어머니의 상으로 상심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이야기할 정도였다면 보통의 관계가 아닌 관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李相弼은 茅谿 文緯와 내암의 관계를 밝히며 "임진왜란 당시 한강은 강원도 통천군수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우도 지역의 의병활동은 남명 문인 가운데 당시 지역에 있으면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던 내암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었다. 내암의 문인이거나 한강문하에 동시에 출입했던 사람은 쉽게 동참할 있었겠지만 한강의 문인이기 사람온 동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51) 鄭慶雲 [孤臺日錄] 卷2 :"山陽吳翼承 到鄕射堂 招余相話 余渡敍隔 翼承新授鎭安縣監 將肅拜于京 故來此 而敍寒暄後 翼承曰 何以贈我 余曰 事君勿欺 愛民以誠 翼承曰 敢不銘諸肺肝乎"
52) 鄭慶雲 [孤臺日錄] 卷4, 1603年 7月 13日條:"鄕中痛梁兇之出於此鄕 必欲陳疏 吾輩定議爲之 以盧益山爲疏頭 以余製疏 姜渭瑞 盧任重勉哉 爲疏色掌"
53) 鄭慶雲 [孤臺日錄] 卷4, 1603年 7月 17日條:"……風雨大作 冒雨往見吳翼承 風雨轉急 山廬盡捲無餘 房中雨下如注 遂與吳兄冒雨而下步 投生骨村舍 其傷苦之狀 豈可以言語形容也 遂議疏事 談論從容"
54) 이에 대한 논의는 李相弼 敎授의 [壬亂 倡義人脈 小考] ( 慶南文化硏究 제17호,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所 1995)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모계뿐아니라, 壬亂때 적국적으로 倡義하였던 思湖와도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없다.
넷째 思湖는 임란 이후 내암과 관련된 大北의 인물들이 대거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문과에 급제55)하여 1615년 귀양같 때까지 淸宦職을 역임하였다. 이런 점들로 보아 思湖를 내암의 문인으로 인정 수밖에 없다.
55) 1610(庚戌 광해 2)年에 文科 式年試 丙科 第三人으로 합격하였다.
(나) 交友
[思湖集]에 실려있는 시와 挽詞 등을 참조하고 종유인들의 문집에 나타난 관련자료를 참조하여 정리한 思湖의 從遊人 들은 <표 1>과 같다. 이는 思湖가 당시 강우지역 대부분의 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였고, 상당한 명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교유인물로 茅谿 文緯, 孤臺 鄭慶雲, 桐溪 鄭蘊, 龍湖 朴文木英 등을 들 수 있다. 일찍이 덕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모계는 思湖와 상당히 절친한 관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께 창의하였던 것이나 出處에 대한 의견 등이 서로 부합하는 측면이 매우 많았다.
나의 벗 문순보는 吾友文順甫
온 몸이 모두 담력이다 一身都是膽
겸손하기는 뭇 사람들보다 먼저 굽히며 謙先衆人屈
용기는 百夫의 용맹보다 뛰어나다 勇出百夫敢
손으로 3척의 칼을 잡고서 手杖三尺劍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려 한다 擬救雄藩陷
성패는 비교하여 헤아리지 않고 成敗非計較
死生에 관계된들 어찌 흔들리랴 死生寧頓撼 56)
밝고 밝은 한결같은 마음 昭昭此一心
깨끗하기가 가을날 거울 같다 皎如秋日鑒 57)
...............
모계에 대한 思湖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남에게 겸손하면서도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용기, 밝고 깨끗한 마음가짐을 지닌 모계를 매우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계는 思湖에 대해 "평생의 논의가 공정을 주로 하기를 힘썼고 偏黨을 세우지 않았다."58) 라고 하며 그의 기상을 크게 평가하였다. 동계가 <甲寅奉事>를 올려 永昌大君의 位號를 追復하고 禮葬할 것 등을 주장하다 제주도에 圍蘺安置되자, 思湖는 그의 伸救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다 兎山으로 귀양가 그 곳에서 病死하였다. 자신 때문에 思湖가 죽었다고 생각한 동계는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59) 평상시 서로의 생각하는 바도 매우 흡사하였다.60)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학문적 기초 위에서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호 박문영은 고향친구로 나이가 들면 鏡湖江 위 아래로 서로 집을 지어 놓고 같이 낚시하며 살기로 약속61) 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56) 원문에는 '憾' 으로 되어 있으나 ‘撼’ 誤字다.
57) 吳長 [思湖集] 卷2, '贈文順甫佐幕金松庵' 其二
58) 鄭蘊 [桐溪集] 卷2 '書吳冀承筆帖後書' :"翼承平生論議 務主公正 不立偏黨"
59) 鄭蘊 [桐溪集] 卷1 '聞翼承反櫬' :"幾日丹旌返故丘 德溪遣業冷如秋 縱然白璧歸 黃壤 難掩光輝萬世流"
鄭藏 [桐溪集] 卷1 '懷翼承' : ‘'三聖臺何處 懷人淚自垂 聖恩思解網 時議用收司 操刃雖非我 興戎竟是誰 豈料膠漆地 媒蘗晩相隨"
鄭蘊 [桐溪集] 卷2 <祭贈承旨吳公長文> : "以公明哲 何不容時 取友不端 而至於斯 黼黻之文 終不少售 啓玉之辭 公 傳萬口……何言此別 永隔千秋 山西海南 相望悠悠 吾雖不殺 伯仁由我 吾罪當誅 公又何辜 乾淸此日 我獨生歸 余懷 之悲 曷有窮已…"
60) 鄭蘊 [桐溪集] 卷1 '八月夜夢見吳翼承' :"君逝三霜矣 今宵夢見之 問云從底處 答曰爲相思 髣髴平生意 分明昔日姿
覺來樑月白 涕淚在鬚頣 "
丁酉再亂 일어나자 思湖와 용호 모두 어머니를 모시고 茂朱와 知禮縣 근처로 몸을 피하였다. 용호가 외출하여 돌아오지 않은 사이 적의 형세가 가까워져, 급히 피신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思湖는 용호의 어머니도 모시고 그곳을 피하였다.62) 그리고 용호는 思湖가 謫所에서 사망하자 私財를 털어 천리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運喪을 해와 상을 치렀다.62) 思湖가 죽은 뒤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과 슬픔을 드러내었다.
잡초 거칠게 우거진 곳에 잠든 것을 이년 동안 거듭 보고 二年重見宿蕪萋
우리 사귐을 떠올릴 수록 고개는 절로 숙여지네 記得交情首自低
근래에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없기에 人世近來武好事
지친 말 홀로 진흙길로 향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오 不堪羸馬獨衝泥 64)
轉句는 당대 현실문제가 어지러워 좋은 일이 없고 친한 벗이 없어 좋은 일이 없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結句에서는 홀로 진흙창 같은 어지러운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은 너무도 힘듦을 보여준다. 반대로 思湖가 함께 있다면 雙頭馬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나가 볼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용호 자신의 짝이 있는 인물로는 思湖밖에 없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 둘 사이의 의리와 신뢰가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강도 이들 사이의 각별한 우정을 인정하고 었었다65)
61) 朴文木英 [龍湖集] 卷1 <龍湖江舍懷思湖亡友> :"柴扉分占此江濱 一約丁寧共釣綸 堪笑浮名能戱事 忍看思老跡成陳" "附註:先生與思湖 分占鏡湖上下 爲晩節相樂之計 而思湖不幸殞於荒裔 竟孤宿心 此詩所以志也"
62) 李源炸, [凝窩集] 卷21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思湖先生吳公巧狀> :"秋倭寇 再動 搬移母夫人於茂朱知禮之境 時 友朴文木英 亦奉老母轉到 而賊勢近逼 朴公 適出外 未還 公以爲義不可捨 冒夜挈置與母夫人 同避他所 亦人所難也"
63) 朴文木英 [龍瑚集] 卷4,安克孝 僎 <行狀> :"其子尙幼 其返機之節 無經紀之人 公 獨慨然 多出私財 料理凡百 終使數千 里旅櫬 得以返葬"
64) 朴文木英 [龍湖集] 卷1 <拜思湖亡友墓次東溪權靜甫濤韻>
65)鄭逑 [寒岡集] 卷5, <'與朴君秀文木英> :"惟吾賢契君秀 或有以念平生之義 許偕令 胤登程"
고대 정경운은 [고대일록]에서 思湖에 대해 약45회 정도 거론하고 있다. 思湖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실과 同宿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思湖가 모친상을 당했을 66), 아들을 얻었을 67) 등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각각의 일에 대한 조의나 기쁨을 표하고 있다. 고대의 思湖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각별한 관심의 표현으로 둘 사이가 절친하였음을 알 수 있다. 思湖의 문인으로는 한사 강대수의 동생이자 思湖의 사위인 鏡湖 姜大延 (1606-1655)이 있다. 이 외에 李挺蓁 李挺蕡 申澳 李樞 李根 등이 있다. 이들은 思湖가 병환으로 고생할 때부터 侍奉하고 治喪에 心力을 기울인 것으로 보아68) 귀양지인 兎山에서 받아들인 제자들임을 추측할 있으나 그 외의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66) 鄭慶雲 [孤臺日錄] 卷3, 1601年 12月 26日條:"聞吳翼承丁憂於念日 翼承無子 而又喪 女畢境遭凶可憐", 1602年 10月 21日 條:"余往山陰弔吳翼承中路相遇 暫弔路左 夕宿李義立家"
67) 鄭慶雲 [孤臺日錄] 卷4, 1606年 8月 12日 條 ;"聞吳翼承生子 朋友之慶 如何"
68) 吳長 [思瑚集] 卷7 <年譜> 1617年 條:"傍無一家親屬 生員李培遂 進士白信民 門人 李挺蓁 李挺蕡 申澳 李植 李根 等 自侍疾至治喪 各盡心力"
<표1. 思湖 교유인물 정리>
姓名 生沒年度 字 號 本貫 居住 文集 備考
李後白 1520-1578 季眞 靑蓮 延安 咸陽 靑蓮集 唐谷門人
趙宗道 1537-1597 伯由 大笑軒 威安 召南 大笑軒集 南冥門人
金沔 1541- 1593 志海 松蓄 高靈 高靈 松庵實紀 退溪 南冥門人 擧義
成汝 1546-1632 公實 浮査 昌寧 金山 浮査集 南冥龜巖門人
郭越 1551-1597 養靜 存齋 玄風 率禮 存齋實紀 從寒岡遊
呂大老 1552-1612 聖遇 鑑湖 金陵 星山 鑑湖集
李許閔 1553-1634 孝彦 五峰 延安 京城 五峰集 延陵府院君
河受一 1553-1612 太易 松亭 晋陽 水谷 松亭集 覺齋門人
文緯 1554-1632 順甫 茅谿 南平 居昌 茅谿集 德溪寒岡門人,擧義
朴汝樑 1554-1611 公幹 感樹齋 三陟 咸陽 感樹齋集 來庵門人
張顯光 1554-1637 德晦 旅軒 仁同 仁同 旅軒集 寒岡姪壻
都敬孝 1556-1622 一源 病隱 星州 江城 病隱集 玉溪門人, 擧義
鄭慶雲 1556-? 德顒 孤臺 晋陽 咸陽 孤臺日錄 來庵門人
李惟誠 1557-1609 汝實 梧月堂 星州 丹城 三梧實紀 守愚堂 覺齋門人
李吃 1557-1627 山立 蘆坡 碧珍 三嘉 蘆坡集 來庵門人
金景謹 1559-1597 而信 大瑕齊 商山 法勿 大瑕齋實紀 覺齋門人, 擧義
盧士尙 1559-1598 志夫 迂溪 豊川 咸陽 豊川世稿 來庵門人, 倡義
曺以復 1563-1602 克休 慕醒齋 昌寧
崔呪 1563-1640 季昇 訒齋 完山 善山 訒齋集
河憕 1563-1624 子平 瘡洲 晋陽 丹牧 瘡洲集
趙㻩 1565-1652 瑩然 鳳岡 林川 晋州 鳳岡集 趙之瑞曾孫
朴敏 1566-1630 行遠 凌虛子 泰安 奈洞 凌虛集 寒岡門人
姜鱗 1568-1610 克修 灆陰 晋陽 咸陽 來庵門人, 寒岡女壻
權 潗 1569-1633 達甫 默翁 安東 丹溪 聯芳輯錄 寒岡旅軒門人
李惟說 1569-1626 汝賚 梧齋 星州 丹城 三梧實紀
李潤雨 1569-1634 茂伯 石潭 廣州 漆谷 石潭集 寒岡門人
鄭 蘊 1569-1641 輝遠 棟溪 草溪 安義 桐溪集 來庵門人
朴文木英 1570-1623 君秀 龍湖 潘南 山淸 龍湖集 寒岡門人
朴明榑 1571-1639 汝昇 知足堂 密陽 安陰 知足堂集 葛川嶧陽寒岡門人
鄭允穆 1571-1629 穆如,敬之 淸風子 西原 醴泉 鄭琢子
鄭弘緖 1571-1648 克承 松灘 河東 介坪 松灘集 來庵寒岡問人
金奉祖 1572-1630 孝伯 鶴湖 豊山 安東 鶴湖集 西崖 旅軒門人
金藎國 1572-1657 景進 後攘 淸風 漢城
權 濤 1575-1644 靜甫 東溪 安東 丹溪 東溪集 寒岡旅軒門人
姓 名 生沒年度 字 號 本貫 居住 文集 備考
盧 脊 1575-1643 任重 省翁 豊山 咸陽
金榮祖 1576 - ? 孝達 忘窩 豊山 安東 忘窩集 西厓門人
李 濯 1577-1631 新之 慶州 忠州
權 濬 1578-1642 道甫 霜嵒 安東 丹溪 聯芳輯錄 潗弟寒岡門人
河 璿 1583-165? 士潤 松臺 晋陽 水谷 松臺集
權克亮 1584-1631 士任 東山 安東 丹溪 東山集 濤姪寒旅門人
林眞怤 1586-1657 樂翁 林谷 恩津 三嘉 林谷集 立齋蘆坡門人
許 燉 1586-1632 德輝 滄洲 金海 三嘉 滄洲集 蘆坡門人
金應祖 1587-1667 孝微 鶴沙 豊山 安東 鶴沙集 西厓旅軒門人
成好正 1589-1639 尙夫 疆齋 昌寧 咸安 疆齋集 篁巖來庵寒岡門人
韓夢參 1589-1662 子變 釣隱 淸州 了樹 釣隱集 篁巖旅軒門人
河弘度 1593-1666 重遠 謙齊 晋陽 玉宗 謙齋集 松亭門人
鄭 頠 1599-1657 子儀 秋潭 延日 晋州 秋潭遺集 從謙齋遊南孫壻
朴 선 ? — 1597 景實 景齋 羅州 咸陽 來庵門人
韓大器 ? - 1611 仲容 孤松 沔川 丹城 孤松集
姜渭明 景靜 山陰 進士
李培遂 完山 兎山 思湖治喪
李庭英 楊州
林應聘 德顯 德溪門人
鄭丹臣 進士
曹敬德 得而 葆溪
洪揖夫 進士
* 18현/공옥대 등의 모임으로 보아 절친 파악이 미진함
III. 學問性向과 現實對應
1. 敬義之學의 繼承
앞의 사승관계와 교유관계를 살펴볼 때 思湖 吳長의 학문이 남명을 淵源 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있다.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思湖가 일찍부터 남명을 尊慕하여 따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詩와 記가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함이 있다. 山水는 남명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이요. 仁智는 남명 선생께서 좋아하시던 것이다. 지금 나와 몇몇 군자들이 장차 능히 자취로 인하여 남명 선생이 즐기시던 것을 얻었다. 이것이 유람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이익 되는 것이고, 산수를 구경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것만은 아니다.69)
思湖가 19세 때 남명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벗들과 頭流山 獐項洞을 유람 하고 남긴 기록이다. "남명은 두류산을 10 회에 걸쳐서 유람하면서 두류 산에서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와 같은 자아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70)라고 한 데에서도 있는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남명은 두류산 유람을 자아성찰을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삼았다. 思湖는 자신의 유람이 단순히 山水의 경관을 보고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남명이 유람을 심성수양에만 그치지 않고 산수를 통해 古人을 생각하고 나아가 고인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를 생각하는 데로 나아갔던 것처럼71), 자신도 남명의 사상과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第一의 목표임을 본면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69)吳長 [思湖集] 卷7 <年譜> 1583年 條:"有詩及記有云 山水南冥之迹也 仁智 南冥之樂也 今吾與數君子 將能因其迹而得其樂 此遊之所以益於進者 而非獨山水之觀 是貴也" 현재 詩는 문집에 남아 있으나 記文은 <年譜>에 위의 내용만 전한다. 70) 李相弼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8, 19-20쪽 參照.
71) 崔錫起 <南冥의 山水遊覽에 대하여, 南冥學硏究> 卷5輯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82-83 參照.
진안현감 오익승이 고을에 도착하여 나를 초대하였다. 내가 가서 그를 보고 차례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서로 막혀있던 희포를 나누었다. 밤을 세워 술을 마시자 좌객들이 모두 쓰러졌으나 익승은 흘로 취하지 않고, 새벽이 되자 남원으로 떠났다.72)
思湖의 강인한 정신력을 살펴 볼 수 있는 일화다. 鎭安에서 咸陽으로 오는 일정이 피곤했을 것인데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밤새워 술을 마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술을 그렇게 마시고 새벽 일찍 길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酒量으 로만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엄격한 자기 수양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이와 같은 정신력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기 어려운 일로 끊임없는 내적 수양을 통해서 이루어 있는 것이다.
思湖는 자신의 학문 방향에 대해 "뜻이 이미 坤二에 서있으니 부지런히 노력함은 乾三에서 지극히 하리라"73) 라고 하였다. 坤二는 <周易> 坤卦 六二爻의 爻辭 ‘直方大 不習 无不利’ 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坤卦 文言傳에 보이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 [敬以直內 義以方外]"는 것으로 들어 갈 수 있다. 乾三은 <주역> 乾卦의 九三爻의 爻辭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를 말한 것이다. 坤二에 세운 뜻의 실현을 위해 결코 쉬지 않을 것임을 表明한 것으로 思湖의 실천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敬義’라는 명제는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비롯된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74) 그러나 思湖가 일찍부터 남명을 尊慕하여 따르려고 하였음으은 앞에서 거론하였다.
72) 鄭慶雲 [孤臺日錄] 卷2, 1587年 11月 13日條:"鎭安倅吳翼承到郡邀余 余往見之 敍寒喧後 相道阻懷 達夜飮酒 坐客皆 倒 而翼承獨不醉 黎明向南原"
73) 吳長 [思湖集] 卷2, <敬勝百邪> :"志己立於坤二 勤亦至於乾蔘"
이런 점으로 보아 思湖가 남명의 ‘경의 지학’ 뜻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思湖의 '경의’에 바탕한 학문과 사상을 살피고자 한다면, 남명의 ‘경의지학’과 연관시켜 살펴보는 것이 타당 하다고 여겨진다.
우선 ‘敬'은 자신의 내적 수양과 관계되는 것이다. 崔錫起는 敬을 "자기의 마음을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도록 專一하게 하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戒懼하고 愼獨하며 恪物致知의 窮理를 통해 자기 마음을 수렴해야 한다는 의미"75)라고7정리해 놓았다. "敬’이라는 한 글자 속에 이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은 그 만큼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